너는 방과 후 인섬니아 마지막 화 자막입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일본 특유의 청춘 감성이 가득한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어쩌면 애니메이션보단 실사 쪽이 더 괜찮은 작품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제 2쿨 겨우 작업한 게 다인 제가 왈가왈부하는 게 꼴이 좀 우습지만
그동안 작업하며 느낀 점들입니다.
개인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건 가독성입니다.
가능한 보기 쉽고 편안하게, 자막을 읽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해 다시 돌려 보는 일이 없게끔 문장을 구성합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일단은 프리시스 님 자막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 작업하고 있습니다.
좋은 자막은 언제나 편안하게 읽히고 받아들이기 쉬운 반면
좋지 못한 자막은 인물들의 대화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고
심하면 작품에 대한 감상자의 평가마저 갉아먹는단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깔끔함을 모토로 삼고 있기에 문장부호와 색상의 사용도 최소화하고 있습니다.
흐응, 헤에, 와아 같은 인물들의 추임새와 감탄사를 비롯한 응, 으으응 같은 긍부정의 표현 또한
자막이 없는 편이 오히려 뉘앙스를 이해하기 편하다고 판단해 기본적으로 넣지 않습니다.
이중 피동을 비롯해 불필요한 표현은 쉽게 바꾸면서도
문장의 큰 구조와 직역이라는 틀에선 가능한 한 벗어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비문은 없는지, 읽으면서 어색한 부분은 없는지 항상 살펴보고 더 좋은 표현은 없는지 생각합니다.
최종적으로 맞춤법 검사기를 돌린 뒤 다시 보며 검수합니다.
야마노스스메 4기를 작업할 때는 아는 게 하나도 없고 자기만의 규칙도 없고
설상가상으로 자막툴도 제대로 못 다뤄 어려운 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그래도 이번 작품을 만들며 어느 정도 원칙이 세워진 것 같습니다.
번역을 하는 데 있어선 역자의 출발어 실력보다 도착어 실력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선 출발어가 일본어, 도착어는 한국어가 됩니다.
역자의 일본어 실력은 결과물에 잘 드러나지 않는 반면 한국어 실력은 굉장히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저 또한 애니를 많이 봤고, 여전히 애니를 볼 땐 자막과 함께 보지만
감상에 불편함을 느꼈던 자막들은 전부 한국어 문장이 서툴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현재 아마추어 자막 제작자들의 일본어 실력은 전부 상향평준화 되어 있지만
퀄리티 차이가 천차만별인 이유는 대부분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간단한 예로 "히도이 아메"라는 말을 두고 어휘가 풍부한 사람은
심한 비, 모진 비, 궂은 비, 세찬 비, 거친 비, 지독한 비, 쏟아지는 비, 강한 비, 폭우 등 다양한 선택지를 활용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쓸 수 있는 말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죠.
단어뿐만 아니라 조사나 어미와 같이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성분에서 공통으로 적용되는 얘기입니다.
저 또한 인섬니아를 작업하며 뉘앙스는 이해했는데 알맞은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고심한 적이 많습니다.
일본어 공부도 중요하지만 한국어 공부의 필요성을 깊이 체감했습니다.
저는 애니 한 편의 자막을 만들 때 총 4번을 보는데
1. 만들기 전에 한 번 (스킵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2. 번역하면서 한 번 (대사 없는 부분은 스킵 하면서)
3. 싱크 맞추면서 한 번 (대사 없는 부분은 스킵 하면서)
4. 완성 후 검수를 위해 한 번 (스킵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작품이거나 재밌는 작품이 아니면 이 과정이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4번이나 보다 보니 일반 감상자의 입장으로 마냥 편하게 보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저는 즐겁게 애니를 보고 싶은 건데 같은 화를 연속해서 4번 보는 건 즐겁지가 않더라구요.
자막을 잡게 된 계기도 야마노스스메 자막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 없어서 시작한 거였고
인섬니아는 당시 애니시아에 등록된 분이 안 계셔서
괜찮은 작품 같은데 아무도 안 만드니까 내가 해볼까 하는 생각으로 시작한 거였습니다.
하다 보니 종국엔 저 말고도 두 분이나 더 하고 계셔서 이거 내가 안 해도 되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타쿠 애니는 기본적으로 심야에 방송하기 때문에
안 자고 새벽에 작업하거나 자다가 새벽에 깨서 작업하게 되는데
저는 일주일에 고작 한 작품 하면서도 이게 체력적으로 좀 힘들더라구요.
다른 제작자분들은 다들 이걸 어떻게 여러 작품이나 하시는 건지 정말로 궁금합니다..
하루 날 새는 것만으로도 일주일의 패턴이 엉망이 돼서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3분기는 상기한 이유들도 있고 맘에 드는 작품도 안 보여 일단 쉬어 가려고 합니다.
다음에 또 좋은 작품이 있고 좋은 기회가 되면 찾아뵙겠습니다.
신작을 잡지 않더라도 기존에 작업한 작품들은 후속 시즌이 나오면 최대한 작업하려고 합니다.
1기를 재밌게 봤는데 2기 자막이 다른 제작자일 때 왠지 마음이 안 내키고 켕기는 그 기분을 저도 알기 때문에..
블루레이 자막은 요샌 Subsplease 같은 Web릴과 싱크가 일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필요성이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찾으시는 분들이 계시기 때문에 나중에 수정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한 분기 동안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도 감사합니다.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4.01.06. 블루레이 자막 추가했습니다.